2026/04 5

Dance Project EGERO 여덟 번째 정기 공연 <고립 환상>

- 결핍을 거름 삼아, 고립감을 느끼는 모든 이에게 건네는 진솔한 위로의 춤 관객이 입장하는 시간에 무대는 이미 나직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놓인 네 개의 흰 직육면체 오브제와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 그 위로 내리는 비 영상은 방영미의 장마>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관객은 언제 그칠지 모를 장맛비의 습기 속으로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지난 4월 25일, 26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린 Dance Project EGERO의 여덟 번째 정기 공연 고립 환상>(연출·안무·기획 이용진)은 시작부터 정교한 연출로 막을 열었다. 이번 공연은 방영미의 장마>, 이민선의 미아>, 정두순의 묻다>, 이용진의 귀로>로 이어지는 옴니버스 구성으로, 이용진과 강건이라는 두 매개자를 통해 유기적..

춤 비평, 리뷰 2026.04.28

악뮤(AKMU)의 '소문의 낙원'은 어떻게 위로를 주는가?

- 들판 위에서 건네는 안부, 요즘 악뮤의 새 앨범 개화(FLOWERING)>에 빠져 있다. 수록곡 중 ‘소문의 낙원’은 안무까지 흥미로워서 매일 한 번 이상 들을 정도다. 이전에도 악뮤 음악을 들으면 세대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일상과 서정을 함께 담은 가사의 힘이 남다르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의 호감과 또 다른 끌림이 있었다. 주변 지인 중에도 중년의 나이에 악뮤의 이번 앨범을 좋아하는 이가 제법 있다. 왜 그럴까? 악뮤의 이번 앨범은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대중 음악계에서 자기가 극한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자각을 한 뮤지션이 그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한 채 겪은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남매 중 동생 수현은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가?

한국 문화예술이 세계 무대에서 거두는 성취는 이제 일시적인 유행이나 이변의 영역을 넘어섰다. 대중음악의 폭발력과 영화·드라마의 서사적 힘을 지나,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한국 예술의 존재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서울시무용단의 일무>는 지난 1월 뉴욕의 권위 있는 무용상인 '베시 어워드'에서 '최우수 안무가·창작자상'을 수상했다. 한국 국공립 예술단체로 처음이다. 지난 3월에는 유럽 연극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구자하 연출가가 연극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2026 국제 입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일무>는 종묘제례악의 의례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냈고, 연출가 구자하는 사소하고 조용한 무대 장치들을 통해 동시대인이 겪는 고립과 불안의 근원을 길어 올렸다. 서로 다른 형식과 문법을 지녔지만, 두 성취는 우리..

시론 2026.04.14

실패와 실수가 ‘과정’이 되는 세상을 위하여

차가운 금속성의 알고리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고, 효율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 청년들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경제적 불평등이 만든 세대 간의 단절은 이제 거대한 심연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단순히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실패할 권리’와 ‘성장할 시간’을 박탈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인 계층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정의했습니다. 현대의 청년들은 바로 이 프레카리아트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숙한..

칼럼 2026.04.05

가르강튀아의 빛이 전하는 안부: 역원근법, 보이지 않는 뒤쪽을 껴안는 시선

사건의 지평선 위로 휘어진 진실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대중을 가장 압도한 것은 거대 블랙홀 ‘가르강튀아’의 형상이었다. 물리학자 킵 손(Kip Thorne)의 계산을 바탕으로 구현된 이 시각적 재현은 우리가 알던 우주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블랙홀 주위를 감싸는 광륜(accretion disk)이다. 실제로는 블랙홀의 뒤편에 있는 빛의 고리가 강력한 중력 렌즈 효과(Gravitational Lensing)에 의해 위아래로 꺾여 올라와 관찰자의 정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거대 질량은 시공간을 왜곡하며 빛의 경로마저 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블랙홀의 뒤쪽을 앞쪽에서 동시에 보게 된다. 이는 가시광선이 직진한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

시론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