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성의 알고리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고, 효율성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 청년들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경제적 불평등이 만든 세대 간의 단절은 이제 거대한 심연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단순히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실패할 권리’와 ‘성장할 시간’을 박탈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인 계층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정의했습니다. 현대의 청년들은 바로 이 프레카리아트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숙한 신입 사원이 현장에서 실수를 저지르며 선배의 가르침 속에 전문가로 성장하는 ‘도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 사다리의 아랫단을 잘라버렸습니다. 기업은 이제 인공지능이 내놓은 결과물을 검토하고 승인할 수 있는 숙련된 기성세대의 직관만을 필요로 합니다. 기초적인 작업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영역을 AI가 대체하면서, 청년들은 실력을 쌓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습니다. 교육공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학습은 ‘비계 설정(Scaffolding)’이라는 지지 구조 안에서 실수를 수정하며 내면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효율만을 따지는 AI 경제는 이 ‘비계’ 자체를 철거해버렸습니다. 청년들은 배울 기회를 잃었고, 기성세대는 그들을 가르칠 여유를 잃었습니다.
기성세대 역시 평온한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면 바뀌어 있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숨 가쁜 나날을 보냅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해, 다음 세대가 어떤 황무지에 서 있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인공지능의 속도는 결국 기성세대의 숙련도마저 추월할 것입니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예견한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청년 세대를 배제한 채 기성세대만의 성을 쌓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인공지능에 종속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탐욕에 눈먼 자들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적 경고를 외면합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시스템이 인류의 실존을 위협하는 시나리오는 이제 상상력의 영역을 넘어 윤리적 경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복종하는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실패를 통해 성찰하고, 실수를 통해 연대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결과물을 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청년들이 마음 놓고 실패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실패가 인생의 낙인이 되는 사회에서 혁신과 인간애는 꽃필 수 없습니다. 실수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데이터’로 인정받을 때, 청년들은 비로소 허둥대던 발걸음을 멈추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단순한 수혜자가 아닌, 인공지능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갈 ‘필수적 파트너’로 인정해야 합니다. 기성세대의 경험적 지혜와 청년 세대의 유연한 감각이 결합할 때, 비로소 기술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후배 세대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좌절은 무능 때문이 아닙니다. 시대의 거대한 파도가 배움의 기회를 덮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성세대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이 실패할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책임이자 존경이며,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청년 세대에게 보여줘야 할 사랑은 바로 그들이 실수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실패와 실수가 삶의 끝자락에 놓인 결과가 아니라, 더 나은 내일로 향하는 따뜻한 과정이 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만이 우리 인류는 인공지능의 서늘한 계산을 넘어, 온기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이 살아남아야 인류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비틀거림이 곧 위대한 여정의 일부가 되는 사회를 위해,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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