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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뮤(AKMU)의 '소문의 낙원'은 어떻게 위로를 주는가?

lsanghe64 2026. 4. 19. 10:42

- 들판 위에서 건네는 안부,

요즘 악뮤의 새 앨범 <개화(FLOWERING)>에 빠져 있다. 수록곡 중 소문의 낙원은 안무까지 흥미로워서 매일 한 번 이상 들을 정도다. 이전에도 악뮤 음악을 들으면 세대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일상과 서정을 함께 담은 가사의 힘이 남다르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의 호감과 또 다른 끌림이 있었다. 주변 지인 중에도 중년의 나이에 악뮤의 이번 앨범을 좋아하는 이가 제법 있다. 왜 그럴까?

 

악뮤의 이번 앨범은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대중 음악계에서 자기가 극한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자각을 한 뮤지션이 그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한 채 겪은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남매 중 동생 수현은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인간의 가치가 자본논리에 눌려 개인의 존엄이 허물어지는 신호에 처절하게 반응했다. 대중 음악계는 깊이 들어갈수록 산소가 희박해지는 곳이다. 수현처럼 현실을 느낀 많은 이가 포기하고 자신을 무너트렸는데, 다행히 수현 곁에는 오빠 찬혁이 있었다. 그들은 남매지만 영혼을 나눈 쌍둥이 같았고, 악뮤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두 사람의 조화로만 완성될 수 있었다. 찬혁은 수현이가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보내는 신호를 개인의 의지박약으로 몰아세우거나 그냥 흘리지 않았다. 찬혁은 수현의 몸부터 관리했다. 운동과 식습관을 바꿔 산소가 희박한 연예계의 공기를 견딜 수 있는 몸을 만들게 했다. 그렇게 일차적인 대항력을 키운 뒤에 남매의 중요한 정체성인 음악을 만들었다. 자기가 겪은, 숨기고 싶은 고난과 고통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어 그것으로부터 희망과 환대를 끌어내었다.

 

- ‘소문의 낙원이 그리는 환대의 안무

예술이 박제된 극장을 벗어나 거친 들판으로 나갈 때, 그 행위는 이미 하나의 선언이 된다. 악뮤의 소문의 낙원안무가 펼쳐지는 곳은 매끄럽고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바람에 풀잎이 눕고 발바닥에 흙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들판이다. 이 공간 이동은 '탈출''낙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도시의 획일적인 격자구조에 갇혀 있던 신체들은 들판이라는 비정형의 공간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 이곳에서 춤은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호흡이 된다.

 

특히 눈여겨 본 지점은 대열을 이룬 24명이다. 이들은 훈련된 근육과 정교한 테크닉을 뽐내는 전문 무용수가 아니다.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직업군, 각기 다른 생의 궤적을 그려온 평범한 이웃에 찬혁의 상상이 가미된 인물이 섞여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일상적 신체'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세련된 회전이나 도약은 없지만, 어깨를 들썩이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는 투박한 몸짓에는 각 인물의 인생 리듬이 담겨 있다. 서로를 닮으려 애쓰지 않는 24인의 군상은,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사회적 폭력에 대한 가장 부드럽고도 강력한 저항이다. 각자의 옷차림과 체구는 다를지언정 그들이 공유하는 자유로움은 그들을 하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묶어준다.

 

안무는 24명이 느슨하게 줄을 맞춘 상태를 유지하며 진행된다. 이는 우리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맺고 있는 관계의 은유다. 인간은 결코 타인으로부터 완벽히 고립될 수 없으며, 관계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오히려 길을 잃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틀이 개인을 압박하는 쇠창살이냐, 아니면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낮은 울타리냐 하는 점이다. ‘소문의 낙원안무는 대열의 흐름을 따르되 개별성을 잃지 않는 규칙 안에서의 자유로운 조화를 보여준다. 관계의 긴장을 타인이 아닌 내가 조절할 수 있을 때, 그곳이 비로소 낙원이 된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누군가 비웃어도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나를 억죄지 않으면서도 든든하게 지켜주는 이 느슨한 연대에 있다.

 

가사에서 반복하는 따뜻한 수프와 고기는 이 중요한 부분다. 도심의 소음과 TV 속 가십에 병든 나그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따뜻한 온기다. 이는 물집을 터뜨리고 붕대를 감는 행위로 상처를 직시하는 용기다.

소문의 낙원이란 결함이 없는 완벽한 인간들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결함을 환대로 덮어주는 곳임을 시사한다. 들판 위에서 24인이 빚어내는 소박한 리듬은, 상처 입은 서로를 씻겨주는 회복 의식으로 승화된다.

 

이 안무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장면이다. 노래가 끝나고 춤추던 이들 마치 마법이 풀린 듯 삼삼오오 짝을 지어 뒤돌아 흩어진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절대 쓸쓸하지 않다. 그들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각자의 길로 나아간다. 이것은 작별의 인사가 아니라,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안부의 확인이다. 낙원은 그곳에 영원히 머무르며 현실에서 도피하는 곳이 아니다. 지친 영혼이 따뜻한 수프 한 접시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자신이 살아야 할 도시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충전소여야 한다. 뒤돌아 흩어지는 이들의 발걸음은 처음에 이곳에 당도했을 때의 무거움을 털어낸 듯 경쾌하다. 한 손을 흔드는 그 작은 몸짓에는 이제부터 다시 마주할 세상의 소문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내면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악뮤의 소문의 낙원은 예술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세련된 기술로 관객을 압도하기보다, 평범한 이웃들의 몸짓을 빌려 모두 각자의 삶에서 낙원의 주동자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들판 위에서 춤추던 나그네들은 이제 우리 곁의 이웃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느슨한 대열의 기억과 가볍게 흔들던 손의 잔상은 우리 가슴속에 진짜 낙원의 소문을 퍼뜨린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이들의 무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잠깐 앉아도 괜찮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