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예술이 세계 무대에서 거두는 성취는 이제 일시적인 유행이나 이변의 영역을 넘어섰다. 대중음악의 폭발력과 영화·드라마의 서사적 힘을 지나,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한국 예술의 존재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서울시무용단의 <일무>는 지난 1월 뉴욕의 권위 있는 무용상인 '베시 어워드'에서 '최우수 안무가·창작자상'을 수상했다. 한국 국공립 예술단체로 처음이다. 지난 3월에는 유럽 연극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구자하 연출가가 연극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2026 국제 입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일무>는 종묘제례악의 의례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냈고, 연출가 구자하는 사소하고 조용한 무대 장치들을 통해 동시대인이 겪는 고립과 불안의 근원을 길어 올렸다. 서로 다른 형식과 문법을 지녔지만, 두 성취는 우리에게 공통된 질문 하나를 소환한다. 과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문장은 오랫동안 한국 문화의 자존심을 지탱해 온 표현이었다. 서구 중심의 미학적 기준 앞에서 주눅 들지 말고, 고유의 뿌리와 정체성을 믿으라는 강력한 주문이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전통에 가치를 부여하고 예술가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이 명제는 한동안 아주 유효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문장이 자칫 한국적이라는 형식적 틀만 갖추면 세계적인 가치가 자동으로 담보될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으로 변질하지는 않았느냐는 것이다. 지역적 특수성은 예술의 훌륭한 출발점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타자의 감성에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차원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의 본질이 바로 보편성이다. 예술에서 보편성이란 단순히 낯섦을 제거하거나 매끄럽게 다듬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형식 안에서도 사랑과 상실, 불안과 희망, 소외와 연민 같은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박동하게 만드는 힘이다. 세계의 관객은 한국이라는 브랜드에 무조건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한국적 형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기 삶과 상처를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깊은 응답이 시작된다.
<일무>의 수상은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번역된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베시 어워드’ 선정위원회는 이 작품을 ‘시각적으로 매혹적이며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한국 전통 의례 무용’이라 평하며, ‘정중동의 완벽한 조화’와 ‘폭발적이고 역동적인 춤의 정점’을 수상 이유로 꼽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종묘제례악이라는 한국의 문화유산 자체가 아니라, 정구호 연출가와 정혜진 안무가가 이 유산을 동시대 감각으로 어떻게 다시 직조했는가이다. 그들은 전통의 외형을 선과 면, 여백과 응집이라는 보편적 미학 언어로 분해하고 재구성했다. 수십 명의 무용수가 절제된 군무를 선보일 때, 뉴욕 관객들은 그것을 먼 나라의 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질서와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숭고한 정신의 발현으로 읽어냈다. 전통은 현재형의 감각으로 치열하게 번역될 때 비로소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구자하 연출가의 수상 역시 같은 진실을 다른 결로 증명한다. 국제 입센상 위원회는 그를 두고 ‘크고 시끄러운 서사 대신 친밀하고 섬세하며 작은 것들을 통해 거대한 세계를 대면하게 하는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그의 무대는 화려한 장치나 웅변적인 대사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 대신 말하는 전기밥솥, 길거리의 작은 돌멩이처럼 소외된 존재들이 주인공이 된다.
대표작 <롤링 앤 롤링>은 한국 사회의 영어 강박과 언어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쿠쿠>는 밥솥을 통해 경제적 위기 속에서 고립된 청년 세대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얼핏 지극히 한국적인 맥락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들이 유럽 공연계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 이유는 명확하다. 서사 안에 흐르는 정체성의 흔들림, 소속되지 못하는 외로움, 시스템에 의해 마모되어 가는 개인의 슬픔이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특수한 장면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특수성 밑바닥에 흐르는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라는 보편성을 끌어올린다. 한국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인간이라는 보편의 바다에 닿는 순간, 비로소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
결국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은 한국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한국적인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안일한 믿음이다. 세계는 더 이상 이국적인 볼거리에 감동하지 않는다. 낯선 문화를 구경하는 차원을 넘어, 얼마나 인간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보듬고 있는지 묻는다. 이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을 시대에 맞게 고쳐 써야 할 때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일 수는 있다. 단,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닿아 있을 때만 그러하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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