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숫자에 갇힌 춤, 화려함에 가려진 숨

lsanghe64 2026. 6. 20. 14:51

춤과 음악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장 원초적인 해방의 언어다. 리듬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구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사회가 부여한 이름표와 위계를 내려놓고 라는 실존의 감각을 회복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언제나 지친 인간을 품어 안는 따뜻한 도피처이자, 세상의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부드러운 전복의 장이었다.

 

뉴스를 틀면 화려한 장밋빛 구호들이 쏟아진다.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주가, 드높아진 국가 위상, 그리고 ‘K-콘텐츠를 위해 투입된다는 역대급 예산. 부산에서는 전임 시장이 예술계의 반발을 무시하며 추진했던 퐁피두 미술관 유치나, 3회 공연에 105억 원을 쏟아 붓겠다던 라스칼라 극장 초청 계획이 재검토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겉으로만 보면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런데 이런 축제의 소음 한가운데서 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일까. 왜 거리에서 마주치는 진짜 예술가들의 얼굴에는 온기 대신 피로와 소외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일까.

이 기시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이 춤과 음악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역사적으로 복기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 규율 사회에서 인간 신체는 국가 생산성이나 가부장적 질서를 위해 정교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부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순간, 그 공간은 하킴 베이(Hakim Bey)가 말한 일시적 자율 구역(TAZ)’으로 변모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관점에서 이는 국가의 생체권력(Biopower)’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저항이다. 통제망을 벗어나 오롯이 리듬에 반응하는 신체들 사이에서는, 사회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간파했듯 일상의 서열이 무너진 문턱 상태(Liminality)’의 강렬한 연대감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위정자들은 이 연대감의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대처 이후 영국 존 메이저 내각이 1994년 제정한 형사사법 및 공공질서법반복적인 비트(Repetitive beats)로 구성된 음악을 야외에서 틀지 못하게 경찰력을 동원한 것이나, 나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대인의 정신이 깃들었다며 재즈를 퇴폐 음악으로 낙인찍고 스윙 청년단을 수용소로 보낸 야만은 정확히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무려 91년간 뉴욕 시민의 춤출 권리를 묶어두었던 인종차별적 카바레 법’, 그리고 장발과 치마 길이를 자로 재며 대중가요의 숨통을 조였던 1970년대 유신 정권의 긴급조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음악 통제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을 길들여진 국민의 규격 안에 가두려는 폭력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21세기의 세련된 행정 권력이 예술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오늘날의 국가는 더 이상 곤봉을 들고 클럽을 급습하거나 금지곡 목록을 발표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성과 지표와 엑셀 시트라는 훨씬 교묘하고 차가운 도구를 손에 쥐었다.

K-콘텐츠의 화려한 글로벌 비전을 보고하는 국무회의 자료에 한국 예술의 절대다수를 떠받치고 있는 기초예술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과거의 독재 정권들이 음악을 금지했던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폭력, 즉 소거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예술, 당장 글로벌 마켓에서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지 못하는 기초예술은 국가 시스템 안에서 아예 태어나지 않은 존재 취급을 받는다.

 

과거 권력이 춤추는 신체를 감옥에 가두었다면, 오늘의 행정 권력은 춤출 수 있는 무대의 바닥 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예술가들의 숨을 끊는다. 수백억 원짜리 해외 유명 극장 초청쇼나 번지르르한 해외 미술관의 브랜드 차용에는 지갑을 열면서도, 정작 그 지역의 골목에서 수십 년간 땀 흘려온 소극장 연극인과 무용가의 월세 걱정에는 눈을 감는다. 예술을 오로지 산업적 아웃풋이나 도시 마케팅의 포장지로만 사고하는 천박한 도구주의의 민낯이다.

 

이러한 참담함은 비단 중앙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시정이 교체되는 부산의 풍경을 보라. 수백억 원의 혈세가 낭비될 뻔한 전시성 사업들이 제동이 걸린 것은 천만다행이나, 새로 출범한 시정의 인수위원회에 문화예술 분야 자체가 누락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다시금 깊은 무력감에 빠뜨린다. 예술계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선거철마다 예술인들의 손을 잡고 지원을 약속하던 정치인들은, 당선증을 거머쥐는 순간 약속이나 한 듯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몇 년 전 필자가 칼럼을 통해 더 이상 그들을 위해 춤추지 마라고 피를 토하듯 호소했건만, 비극적인 뫼비우스의 띠는 사람만 바뀐 채 오늘도 묵묵히 돌아가고 있다.

도대체 이 나라 위정자들의 문화예술 인식 수준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오랜 역사적 철학이 담긴 사찰의 가람 배치를 무지한 증·개축으로 훼손해 놓은 현장을 보며 승려 교육에 미술사를 넣어야 한다고 탄식했던 과거의 기억이, 이제는 정치인과 행정 관료들의 시험 과목에 최소한의 예술사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냉소로 치환된다. 철학이 부재한 행정은 필연적으로 폭력이 된다. 뿌리인 기초예술이 썩어가는 데 잎사귀에 금칠을 한다고 그 나무가 황금나무가 되지 않듯, 예술가의 실존적 고통 위에 세워진 K-컬처의 마천루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시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국가에게 문화예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정권의 홍보 전단지에 찍히는 홀로그램 마크도 아니요, 연말 통계청 그래프의 우상향을 장식할 수치도 아니다. 예술은 이 차가운 자본의 질서 속에서 상처받고 마모되는 한 인간의 영혼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체온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에게 감히 권한다. 예술에게 자꾸만 쓸모를 증명하라고 윽박지르지 마라. 1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번지르르한 외래종 꽃을 수입해 심기 전에, 우리 발밑의 척박한 땅에서 묵묵히 자라나고 있는 야생화들에게 먼저 물을 주어라. 엑셀 시트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의 반복되는 비트와 자유로운 몸짓을 행정의 이름으로 소거하지 마라.

그리고 이 시간에도 캄캄한 지하 연습실과 텅 빈 무대 뒤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박자를 세고 있을 동료 예술가들에게 애정을 담아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위정자들이 당신의 춤을 지우려 할지라도, 당신이 만들어내는 그 일시적 자율 구역의 온기마저 빼앗을 수는 없다. 우리의 춤은 국가의 지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멈추지 말고 춤추시라. 그 거칠고도 아름다운 숨소리로 이 폭력적인 무지의 시대에 가장 인간다운 균열을 내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