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ube, Mirror, Balloon
노주련 작가는 오랜 기간 큐브(Cube)와 함께했다. 작가의 큐브는 무뚝뚝한 입방체가 아닌 표정 있는 미러 큐브(Mirror Cube)이다. 세상을 발랄하게 반영하는 반짝이는 미러 큐브를 다양하게 변용해 왔다. 2021년 작가의 <Golden Age> 전시에서 미학자 김종기는 ‘노주련의 큐브는 모나드(Monad)이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듯이 모나드는 부분을 가지지 않는 독립된 실체다. 따라서 모나드는 서로를 연결하는 창이 없다. 모나드는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소우주이다. 따라서 개개의 모나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개개의 모나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vorstell)할 뿐이다. 그러나 각각의 모나드가 세계를 표상하는 방식은 상호적이다. 이 때문에 창 없는 모나드는 서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하나의 완전한 소우주가 다른 숱한 소우주와 함께 구성하는 대우주, 이것이 모나드로 구성된 세계이다.’라고 분석했다. 노주련 작가의 큐브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무한히 확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큐브는 끼리끼리 관계 맺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무게를 떨쳐내고 본격적으로 외부와 관계 맺기 시작했다. <구르기 좋은 날>은 완결된 소우주가 자기 완결성에 갇히지 않고 외부(타자)라는 무한을 향해 능동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이전에 큐브가 좌대에 올려져 있거나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였을 때도 예리하게 각을 세우지 않고 바람을 은근히 품고 반짝이며 외부를 반영했던 것도 결국 세계와 관계 맺기를 준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 노주련의 표면
자체 발광 수단 없이 반짝이는 것은 외부의 빛을 수용해서 되돌려 주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런 식의 발광은 수용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작가의 큐브도 수용하는 오브제이다. 내부에 바람을 품어 수용하고, 구르는 장소에 고착한 역사를 수용한다. 숲의 공기와 햇빛을 받고, 작가의 기억과 경험도 담아낸다. 이렇게 담고 품은 것들을 반짝이며 확산시킨다. 팽팽한 외면에서 일렁이는 이미지는 역사와 기억의 날 선 부분을 따뜻하게 보듬고, 아련하게 만들어 타자의 역사와 기억마저 나의 노스탤지어가 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노주련의 표면은 뽐내지 않는 빛이 있다. 요란하지 않은 반짝임, 세상을 담아 빛으로 발하는 따뜻한 반짝임이다. 전시장에 있을 때, 거리에서 구를 때, 노을 진 바다를 떠다닐 때, 숲을 헤치며 구를 때도 침착한 반짝임은 주위를 품고 세상과 어우러진다. 반짝이며 어울리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반짝임이 네 눈을 찌르지 않고 너의 심기를 흔들지 않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뜻하고 넉넉한 반짝임, 담담한 발광(發光)은 흔들림 때문이지 싶다. 곧게 뻗어 사방을 휩쓸지 않고 청사초롱처럼 흔들리며 아롱거리는 수줍은 화려함은 작가를 닮았다.
- ‘장소 상실’의 시대
존재(being)는 ‘지금(now)’이라는 시간과 ‘여기(here)’라는 공간의 교직(交織)으로 실존이 규정된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특정한 시·공간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인간은 환경을 접할 때 그 환경을 자신과 분리해 구조적 모형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환경의 한 부분에 포함해 총체적으로 체험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전자가 ‘공간’을 인식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장소’를 인식하는 태도이다. 낯설고 추상적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친밀하고 구체적인 ‘장소’로 전환된다. 장소는 단순히 개인의 경험에 의해 주관적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과정에서 구축된다. 장소성 자체도 장소와 같이 생성 소멸하며 재편된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 상실’ 이론을 펼쳤다. 그에 의하면 장소의 본질은 삶의 터전으로써 생생한 삶의 체험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이를 ‘장소의 진정성’이라고 하며, 장소가 진정성을 상실했거나 훼손된 상태를 ‘장소 상실'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장소 상실'은 어떤 장소가 고유한 특징과 분위기를 잃고 탈맥락화하는 것이다. 렐프는 장소 상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장소의 회복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지금 ‘장소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장소의 진정성은 얄팍한 관광 상품으로 포장돼 영혼 없이 팔려 나가는 볼거리의 진열장 아래 묻혔고, 삶의 근거로써 거주의 가치는 돈으로 평가된다. 장소 상실은 곧 삶의 뿌리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노주련 작가가 여러 장소를 큐브와 함께 굴러다닌 것은 장소에 깃들어 있었지만, 상실한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려는 치유의 여정이지 싶다.
- 장소의 진정성 깨우기
무게를 벗어던지고 세계에 몸을 던진 오브제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붙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명명하는 순간 확산을 멈추고 이름의 한계에 멈춘다. 큐브라고 불렸을 때 딱딱하지 않았고, 미러 큐브라고 했을 때 외부를 단순히 재현하지 않고 일렁이게 반영했으며, 벌룬이라고 부르는 지금은 유머러스한 모서리로 경쾌한 중량감을 뽐내며 굴러다닌다. 큐브이면서 큐브가 아닌, 벌룬이면서 대지에서 유랑하는 오브제는 어느 한순간도 외부에서 부여한 이름에 정주하지 않았다. 서 있었을 때나 구를 때도 장소를 점유하지 않고 장소에서 흘렀다. 장소에 머물러 규정될 틈도 없이 흐르고 굴러 장소를 덮고 있는 단단한 상실의 껍데기에 균열을 만들었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인간의 이성이 악(惡)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를 상기하게 하는 랜드마크이다. 세월의 더께로 추모비가 상징하는 고통과 희생의 역사를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을 때, 작가는 반짝이는 큐브와 함께 기억의 골목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침잠한 역사적 기억을 일깨운다. 성당의 종교적 위엄, 거룩함이 관광객의 발길 아래 놓이고, 휴대전화 카메라의 피사체로 전락한 성당 마당을 경쾌하게 구르며 천박한 자본의 사탕발림을 조롱하기도 한다. 유일무이한 일회성으로 ‘그곳’에 나타나 구르는 큐브는 짧은 걸음으로 장소에 균열을 내고 지나간다. 머물러서 장소에 두께를 더하는 ‘있다’가 아닌, 목격의 시간성을 담은 ‘있었다’로 끊임없는 서사의 진화를 추동한다. 목격한 뒤에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으면서 서사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있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묻힌 삶의 뿌리를 이야기로 들추어내어 현재에 계속 중첩하면서 장소의 진정성을 깨우는 진행형이다.
장소 특정적 예술은 ‘장소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 특정한 의미를 지닌 장소를 선정하여 일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분야’를 말한다. 장소의 의미는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주어진다. 노주련의 오브제가 비극을 추모하는 장소나 종교적 위엄과 영광을 지닌 곳,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광장에서 구를 때, 그곳이 지닌 특정한 의미를 일깨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미를 잠시 지우기도 한다. 잠시 지워진 역사·의미·위계의 틈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싹튼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장소라도 그곳에서 구르기만 한다면, 역사의 위계와 상실의 두께가 벗겨지면서 서로의 기억과 경험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 이방인, 낯설고도 친근한 존재
우리는 수시로 이방인이 된다. 익숙한 공간에서도 문득 낯선 존재가 될 때가 있다. 홀로 있는 공간에서조차 주변과 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곳에 속하지 못하지만, 속하려는 존재인 이방인은 낯설지만 친근해지기를 바란다. 낯설다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장소는 편견이 없다. 들어오고 나가는 모두를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익숙함과 낯섦이 평등하고 영원한 정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장소는 알고 있다. 편견 없는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허락이 아니라 불쑥 들어서는 용기이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자격으로 불쑥 들어서서 나의 기억과 경험을 교감할 수 있다면, 그날이 바로 구르기 좋은 날이다. 구르면서 딱딱한 외피를 부드럽게 만들기 좋은 그런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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