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계단의 발명-오름의 미학과 머묾의 윤리에 대하여

lsanghe64 2026. 6. 20. 14:49

인류는 과연 언제부터, 대체 왜 땅을 깎아 계단을 만들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건축의 역사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내면의 욕망과 사회의 뼈대를 향한 깊은 탐구로 이어진다. 자연이 빚어낸 산과 언덕은 본래 매끄럽게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곡면이다. 그 자체로 오를 수 있는 흙길과 비탈을 굳이 잘게 쪼개어 수직과 수평의 교차로 만든 것은 자연의 연속성을 인간만의 절차로 재편하려는 대담한 시도였다.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여러 번의 단속적인 승인 과정처럼 나누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계단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다. 공간을 빌려 시간을 분할한 인류의 놀라운 발명이자, 이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통과의 단계로 만들어버린 철학적 선언이다.

 

도구 하나 없이도 높은 곳에 닿게 해준다는 점에서 계단은 무척 유용하지만, 그 도구 없음은 기묘한 역설을 품고 있다. 계단 그 자체가 도시가 쥐고 있는, 혹은 집과 신전과 극장이 쥐고 있는 거대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수직성이 부여하는 몽상에 대해 분석했듯, 인간은 어떤 공간을 높다라고 인식하고 합의한 순간부터 그곳에 닿으려는 강렬한 동경을 품어왔다. 그리고 그 높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좋음이 되었고, 이내 권력이 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부터 신의 제단, 군주의 자리, 현대의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계단은 언제나 권위의 문법을 대변해 왔다. 발걸음을 거듭해 위로 오를수록 그 위는 더 견고한 지배 공간이 된다.

 

하지만 우리 몸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계단은 신체를 기민하게 깨우고 훈련시키는 훌륭한 장치이기도 하다. 근대 무대미술의 선구자 아돌프 아피아(Adolphe Appia)가 무대 위 계단과 단상을 통해 배우의 입체적 움직임과 리듬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처럼, 평지를 걷는 편안한 몸과 달리 계단을 오르는 몸은 매 순간 중력과 투쟁하며 균형을 재계산해야 한다. 무릎과 발목, 허리의 근육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음 칸을 예측하고 내디딘다. 이 예측과 실행의 반복은 묘한 도전의 쾌감을 선사한다. 가빠지는 숨과 빨라지는 심장 박동은 '내가 지금 위로 나아가고 있다'라는 생동하는 감각을 가시화한다. 결승선이라는 단 하나의 막막한 목표 대신 발밑의 작은 디딤판들이 매 순간 작은 승리를 촘촘하게 나누어 제공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산을 한 번에 넘을 수 없어 좌절할 때, 우리는 '단계'라는 계단의 속성을 빌려와 자신을 다독이고 달랜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아 세상을 굽어볼 때,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진실은 바로 그 성취의 지점에서 계단이 거대한 장벽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이다. 계단이 성취를 잘게 나누어 환희를 주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실패와 좌절 역시 잘게 나누어 안긴다. 단 한 칸의 턱이 막히면 그 다음 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 누군가에게 계단은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물리적 표상이지만,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장애를 가진 몸, 혹은 관절이 쇠약해진 노년의 몸에게 계단은 너무도 폭력적인 금지의 다른 이름이 된다. 들어갈 수 없는 도서관, 올라갈 수 없는 무대, 접근할 수 없는 극장 객석. 계단은 이 세계와 도시가 오직 특정한 표준의 몸만을 기준으로 설계되었음을 매일같이 조용하고도 잔인하게 폭로한다. 턱 앞에서 속절없이 돌아서야 하는 포기와 좌절은 결코 개인의 부족함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오만하게 지어진 사회적 설계가 낳은 배제의 결과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예술은 이처럼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계단을 욕망과 서사를 끌어안는 훌륭한 상징으로 자주 호출해 왔다. 화폭 속에 묘사된 계단은 관람자의 시선을 단숨에 위로 끌어올리며 시각적 욕망의 방향을 통제한다. 영화 속 계단은 긴장과 심리적 전환을 시각화하는 최고의 장치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감독이 영화 <전함 포테킨>'오데사의 계단' 시퀀스에서 보여준 몽타주 기법은 계단이 품은 수직적 폭력과 공포를 극대화했으며,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 속 계단들은 불안과 붕괴의 하강을 섬뜩하게 그려냈다. 계단을 오르는 인물은 희망이나 쟁취의 서사를 입지만, 쫓기듯 내려오는 인물은 추락의 냄새를 남긴다. 계단 위에 주저앉은 사람에게서는 막막한 기다림을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에게서는 짙은 망설임을 읽어낸다. 단절된 문이나 평면으로는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인간 심리의 미세한 굴곡을 계단은 몸의 고단한 이동이라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해 낸다.

 

내가 오랫동안 애정을 담아 지켜보아 온 무대예술의 현장에서 계단은 한층 더 노골적이고 지배적이다. 무대 위의 계단은 배우와 무용수의 신체를 물리적인 위계로 단호하게 배치한다. 단 한 칸이라도 높은 곳에 선 인물은 대사가 적어도 무대를 압도하며 더 육중하게 존재한다. 조명의 밝기가 같을지라도, 물리적 높이 그 자체가 이미 스포트라이트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전 연극이나 오페라는 계단을 통해 집단을 손쉽게 분리해 낸다. 위에 선 자는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 선 자는 올려다보며 이를 수행한다. 관객은 계단이 만들어낸 그 시선의 수직적 방향성을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인다. 계단은 구구절절 권력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공간에 권력을 묵묵히 배치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뼈아픈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은 과연 계단이 품고 있는 이러한 위계와 폭력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계단을 더 우아하고 숭고하게 장식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상징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의 장벽을 낭만화해 왔던가. 누군가에게는 물리적으로 접근조차 불가능한 배제의 공간을 예술의 숭고미로 찬양하고, 억지로 기어올라야만 하는 가혹한 구조를 숭고한 의식으로, 험난한 통과의 절차를 고귀한 전통으로 포장하며 외면해오지는 않았는가.

 

더욱이 예술계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계단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견고한 풍경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올라갈 수 있는 폐쇄적인 심사 구조, 끈끈하게 얽힌 네트워크와 학벌, 특권층만이 향유하는 레퍼런스와 난해한 취향의 암호들. 그 모든 무형의 권력들이 마치 한 칸 한 칸 오르기 힘든 계단의 모양새를 하고 굳건히 서 있다. 예술이 무대 위의 계단을 매혹적인 상징으로 사랑하면 할수록, 예술계 스스로가 만들어낸 진입장벽과 내부의 위계적 계단을 은연중에 정당화할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동시대 예술이 희망적인 이유는, 계단이 언제나 상승과 지배라는 단 하나의 방향성만을 갖지 않도록 낯설게 전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계단을 재료로 삼는 성찰적인 작업들은 오히려 계단의 숨겨진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의 굳은 인식을 흔든다. 예컨대 끝없이 오르도록 독려하는 대신 사람을 턱 밑에 멈추어 서게 만드는 무대, 계단이 쟁취해야 할 도전이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배제임을 관객이 자신의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도록 고안된 장치들이 그러하다. 어떤 안무가는 계단의 길이를 비정상적으로 늘려 육체의 피로를 극대화하고, 어떤 연출가는 단의 높이를 기형적으로 키워 아예 오를 수 없는 절벽으로 만든다. 또 어떤 극은 올라가지 못한 채 계단 아래에 멈춰 서 있는 배제되고 소외된 몸을 관객이 아주 오래도록 먹먹하게 응시하도록 이끈다.

 

이는 계단을 그저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로 가볍게 소비하는 것을 거부하고, 계단이 만들어낸 고통의 시간기다림, 망설임, 그리고 돌아섬을 무대 전면에 당당히 올려놓는 행위다. 그 순간 무대 위의 계단은 막연한 은유와 상징을 벗어던지고 차가운 현실이 된다. 무대가 현실의 모순과 직면하는 순간 공연을 바라보는 평론가의 비평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조명과 동선의 유려한 예술적 장치를 찬미하는 대신 지금 이 시대 극장에, 이 세계에 '누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가'를 발언해야 하는 윤리적 책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며, 우리의 시선은 이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향한 질문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의 모든 계단을 허물 수 있을까. 혹은 계단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할 수 있을까. 중력이라는 물리적인 한계로 인해 계단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계단만이 유일하고도 정상적인 길'이라고 믿어온 야만적인 시대는 이제 끝내야만 한다. 건축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굽이굽이 이어지며 모두를 품어 안는 완만한 경사로와 차별 없이 층을 잇는 엘리베이터, 휠체어와 유아차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넓은 통로, 그리고 누구나 멈춤 없이 넘을 수 있는 낮은 문턱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더 근본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우리 사회와 예술이 수직적 단계를 유일한 미덕으로 삼고 찬양하던 오래된 습관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고통을 견디고 딛고 올라오라라고 다그치는 비정한 능력주의의 언어 대신, ‘처음부터 이 평평한 길로 함께 들어오자라고 곁을 내어주는 다정한 연대의 설계가 필요하다. 오직 선택받은 소수만이 땀 흘려 거머쥐는 숨찬 성취를 찬양하던 낡은 관념을 내려놓고, 세상의 더 많고 다양한 몸이 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포용의 미학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계단은 그것이 고안된 발명의 첫 순간부터 이미 다분히 정치적인 존재였다. 인류가 처음 땅을 자르고 인위적인 높이를 만들 때, 우리는 무심코 공간과 함께 사람의 자리도 위아래로 나누어버렸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계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적 구조나 무대 디자인의 호불호를 논하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어떤 세계를 짓고 싶은지, 누구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치열한 질문이다.

 

미래의 예술 역시 그 시대의 무대 위에 다양한 형태의 계단을 올릴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계단이 더 이상 누군가를 짓누르거나 소외시키는 권위의 장식으로만 서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계단이 묵시적으로 상징해 온 수직적 계급과 절차를 무비판적으로 찬미하기보다, 그 상징이 역사적으로 만들어낸 차별과 배제의 상흔을 아프게 드러내고, 모두가 수평적으로 눈을 맞출 수 있는 다른 길을 상상하는 예술이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예술과 삶의 무대에서 마주하게 될 가장 급진적이고도 아름다운 장면은 용기 있는 누군가가 가파른 계단 앞에서 멈추지 않고 씩씩하게 오르는 영웅적인 뒷모습이 아닐 것이다. 폭력적인 단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단도 끝내 특정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외롭게 돌려세우지 못하도록 기어이 곁에 길을 내고야 마는, 인간을 향한 연대의 장면이다. 바로 그때, 비로소 계단의 권력이 해체된 '계단 이후의 세계'를 목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