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독거노인이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홀로 죽음을 맞이한 경우를 두고 '고독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독'은 대부분 자기선택으로 마주하는 상황이다. 독거노인의 상황을 고독하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상황이 사회구조적으로 소외된 상태라서 그렇다. 그래서 '고독사'는 '소외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과 이웃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관계가 단절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고독은 자발적 선택에 의한 '자기 대면'의 시간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귀향(Die Heimkehr)」에서 오랜 방랑 끝에 자신의 고독으로 돌아오며 다음과 같이 외친다.
"오 고독이여!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 너는 너무나 오랫동안 낯선 타향에서 야생의 상태로 살았구나!" (O Einsamkeit! Du meine Heimat Einsamkeit! Zu lange lebtest du wild in wilder Fremde...)
여기서 니체에게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오염된 자아를 씻어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치유와 구원의 장소다. 고독은 인간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내면의 성장을 도모하는 숭고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지금 '고독사'라고 부르는 현상은 자발적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 발생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소비 사회에서 쓸모를 다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쓰레기가 된 삶(Wasted Lives)'이라 표현하며, 이들이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비판했다.
‘고독사’는 죽음의 '형태'(혼자 죽음)에 집중한 용어이며, ‘소외사’는 죽음의 '원인'(관계와 시스템의 부재)에 집중한 용어이다. 따라서 '소외사'라는 표현은 이 죽음이 개인의 성격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방치에 의한 결과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만약 ‘고독사’를 '소외사'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동시에 던지게 된다.
"이 사람은 왜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서 누락되었는가?"
"지역 공동체는 왜 이웃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했는가?“
'고독'이라는 단어는 자칫 그 죽음을 개인의 쓸쓸한 뒷모습으로 미화하거나 사사로운 영역으로 치부하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소외'는 국가와 이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다.
'소외사'는 고인에 대한 깊은 예우가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그분들은 고독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으나 끝내 손을 잡아줄 시스템을 찾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죽음을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고, 공동체의 아픔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언어의 전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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