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허수경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lsanghe64 2026. 7. 8. 11:49

허수경 유고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을 천천히 읽었다.

허수경은 1992년 독일로 가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2018년 10월 3일 위암으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유고시집 곳곳에는 죽음, 이별, 그리움 등이 묻어 있는데
개인적인 감정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감정으로 확산하는 것 같다.

눈에 박히는 시가 몇 편 있엇는데
그중 유독 맴도는 한편에 대한 내 나름의 분석을 해본다.
재미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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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꿈>
꽃무늬 바지를 입고 노인은 정집으로 향하는 수유꽃 노란 길을 걸으신다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 장씩 개키고 있다 절빕에는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이 고기반찬 없는 상을 차리다가 병든 자목련을 바라본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 마을의 몇 안 되는 염소들은 실개울 곁에 앉아 간첩이 내려왔다는 뉴스가 박힌 신문을 우물거리고 있다 근처 큰 도시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던 아가씨 셋이 개여울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이미 염소의 위장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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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제목인 '봄꿈(춘몽)'은 흔히 덧없는 환상이나 아름다운 몽상을 뜻하지만, 시인은 이를 역전시켜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소외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얽힌 악몽 같은 현실을 펼쳐 보인다. 서사가 단절된 듯한 모호함은 역설적으로, 논리적인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파편화되고 상처 입은 우리 삶의 실존적 구조를 그대로 모사(Mimesis)하는 문학적 장치로 작동하는 것 같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노인이 걸어가는 '수유꽃 노란 길'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어지는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 장씩 개키고 있다"라는 행에서 분위기가 급변한다. 이불이나 옷을 접어 정돈하는 행위인 '개킨다'라는 동사는 떨어지는 꽃잎을 죽음과 이별을 준비하는 일종의 장례 의식으로 환원한다. 뼈가 가벼워 생의 무게마저 희미한 새들은 소멸해 가는 생명들을 고요히 정돈하는 인도자처럼 비친다.

절집이라는 신성한 공간에서조차 '고기반찬 없는 상'이 차려진다.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은 삶의 환희와 유희에서 철저히 소외된 가난하고 고단한 군상을 뜻한다. 만개한 꽃 대신 '병든 자목련'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에는, 생명의 계절인 봄에도 치유되지 않는 존재의 원초적 비애가 짙게 배어 있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공간적·존재론적 핵심을 관통한다. 절집(극락)에서 얻는 위안은 비루한 한 끼의 밥처럼 잠시뿐이며, 그들이 다시 발을 디뎌야 하는 일상의 터전은 곧 '지옥'이다. 이는 종교적 구원마저도 현실의 거대한 고통을 온전히 해소하지 못하는 냉혹한 생의 조건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실개울 곁의 염소들은 신문에 박힌 비극적인 뉴스('간첩 사건', '술집 아가씨 셋의 변시체')를 여물처럼 씹어 삼킨다. 여기서 신문은 시대의 비극과 인간의 죽음이 기록된 매체다. 그러나 염소의 위장으로 들어감으로써, 잔혹한 죽음들은 소화되고 배설되어 완벽한 망각의 영역으로 사라진다.

시인은 끔찍한 사회적 타살과 비극 앞에서 탄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이 신문의 종잇조각이 되어 염소의 위장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과정을 무심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덤덤하게 서술한다. 이러한 비감정적 타자화는 '죽음과 폭력이 너무도 흔해져 누구도 제대로 애도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을 역설적으로 고발한다. 감정을 억누른 담담함이 오히려 독자의 가슴에 더 깊은 충격과 애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허수경 시인의 <봄꿈>은 연결되지 않는 듯한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밑바닥에 흐르는 소외, 가난, 국가적 폭력, 그리고 잊힌 죽음들을 하나의 캔버스에 병치한다.
상징들이 어둡고 피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인이 예쁘고 화려한 '봄의 환상'을 걷어내고 그 그늘에서 묵묵히 고통을 견디며 사라져간 약자들의 실존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풍 한번 가지 못한 얼굴들, 개여울에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이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을 품은 채 지옥 같은 현실을 걷는 노인의 발걸음까지. 시인은 파편화된 슬픔을 섣불리 위로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냉혹한 소멸의 과정을 시편에 고스란히 담아냄으로써, 염소의 위장 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던 가엾은 죽음들을 우리의 기억으로 다시 끄집어낸다. 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해 보이지만, 기저에는 잊혀가는 힘 없는 존재들의 고통을 한 장의 꽃잎처럼 귀하게 개켜주고자 하는 시인 특유의 깊고 숭고한 인간적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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