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임회숙 『그들 곁으로』

lsanghe64 2026. 1. 12. 14:41

이 소설집에는 6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모두를 갈무리 할 능력이 없어, 깊이 다가 온 한 편에 관한 독후감으로 전체를 갈음한다.

 

저 너머

삶의 굴곡을 품어 안은 인고의 미학, ‘저 너머를 향한 애도

 

1. 예지(豫知)라는 고독한 축복

소설의 주인공 분순은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지녔다. 이 특별한 능력은 그녀에게 축복이기보다 두려움이자 고독의 원천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비극을 미리 보았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틀어막거나 사람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남편의 죽음과 막내아들의 신체적 결함까지도 미리 보았지만, 그 비극을 온몸으로 받낼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운명론적인 체념이 아니라, 닥쳐올 불행을 미리 알고도 도망치지 않은 한 인간의 숭고한 '견딤'에 주목한다.

 

2. '육발이' 아들을 향한 지극한 방패

소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상징은 막내아들 종길의 발가락 사이에 돋아난 살 무더기. 유복자로 태어난 종길이 애비 잡아먹은 놈이라는 모진 낙인을 견뎌야 할 것을 알았기에, 분순은 아들의 기형적인 발을 오히려 그 불운을 대신 막아주는 방패로 여긴다. "엄마 마음인께"라며 건넨 쇠 불상과 아들의 발을 어루만지던 분순의 손길은,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식을 지켜내려 했던 지극한 모성의 발로다. 아들의 흠결을 자신의 죄책감으로 치환하며 평생을 기도하듯 살아온 그녀의 삶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길의 단정한 얼굴을 확인하며 안식을 얻는다.

 

3. 역사적 상흔과 자연으로의 귀환

작품의 배경인 지리산과 세석평전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비극적 현대사의 목격자다. 소개령과 산사람(빨치산), 그리고 총성으로 점철된 과거의 기억은 분순의 생애와 촘촘히 엮여 있다. 하지만 소설은 이 비극을 분노로 풀어내지 않는다. 대신, 96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낸 육신이 한 줌의 뼈로 돌아가 소나무 아래 뿌려지는 과정을 통해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 "한 생이 다른 생을 넘치게도 남겼다"는 분순의 회고처럼, 그녀의 고통은 자식들의 삶 속에 깊은 그늘이 되어 그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저 너머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정하면서도,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승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분투였는지를 역설한다. 흙 속에서 우연히 발견해 평생을 함께한 쇠 불상처럼, 분순의 삶은 볼품없고 낡았을지언정 그 자체로 하나의 단단한 신앙이었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달빛은 그녀가 살았던 마을과 밭고랑을 평등하게 비춘다. 이 소설은 내게 묻는다. 당신이 견디고 있는 오늘이 훗날 누군가에게 어떤 '저 너머'의 풍경이 될 것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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