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국립대 교수가 자기 수업에 시각장애인 안내견 출입을 제한했다. 다른 학생들이 안내견을 쳐다보느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수업 녹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일은 현재 국가인권위에 진정이 됐고, 장애인 단체가 해당 교수를 ‘장애인복지법’ 위반으로 신고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것은 분명하게 접근성에 관한 문제다. 흔히 접근성을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이 원하는 장소에 편하게 갈 수 있는 정도로 이해한다. 접근성의 본래 의미는 신체적, 인지적, 기술적 등 다양한 제약이 있는 모든 사용자가 제품, 서비스, 정보 등에 불편 없이 접근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접근성은 장애인만의 문제라기보다 민주주의와 직결되는 문제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고대 그리스 아고라의 시민들부터 현대의 투표장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는 참여를 확장하고 그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넘어 정보와 권력에 대한 접근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접근성을 장애인 이동권이라고만 보는 것은 매우 편협하다. 도로의 턱을 없애고 경사로를 설치하는 일은 접근성 문제에서 가장 기본이다. 경사로는 장애인만 아니라 유모차를 미는 부모, 일시적으로 다친 사람에게도 길을 열어준다. 여기서 시작해 보이지 않는 장벽을 제거하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정보 접근성은 모두에게 이해와 소통의 기회를 넓힐 수 있지만, 온라인 행정 서비스나 은행 앱이 누군가에게는 장벽인 것도 같은 문제다.
접근성 문제에 가장 예민한 장애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다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접근성 문제가 현실적 장벽인 삶에서 이 말은 푸념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계단 앞에서, 정보의 벽 앞에서, 제도와 편견 앞에서 멈춰 서야 한다면, 그것이 존재한다 해도 의미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접근하지 못하는 순간, 장애인은 살아있어도 사라진 자가 된다는 점이다. 철학자 랑시에르가 말한 ‘몫이 없는 이들’이 된다. 이 존재의 부정이 접근성 문제의 본질이며, 민주주의 실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예컨대 투표소가 2층에만 설치되어 있고 승강기가 없다면, 한 사람의 시민권은 사실상 삭제된다. 학교와 직장에서 필요한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교육권과 노동권은 종이 위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외면한 결과다. 장애인이 자리에 없다고 해서 참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접근할 수 없는 구조가 그들을 밀어낸 것이다.
이런 현실적 장벽 앞에서 스스로 문제 해결에 나선 사례가 있다. ‘윌체어’라는 휴대전화 앱은 의지를 나타내는 영단어 ‘윌’과 ‘휠체어’를 합성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교통약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식당과 카페, 편의점 등을 추려 정보를 제공하는 무료 서비스다. 개발자는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부산 거주 장애인이다. 2021년 개발해 부산을 중심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현재 서울, 경기도 경남 일부 지역과 계약을 체결했고, 해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많은 접근성 관련 정책이 나오는 중에도 장애인이 직접 나선 이유는 접근성이 한쪽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쪽과 사용하는 쪽이 함께 업데이트해 가는 과정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접근성 연구자이자 다나카 마유키는 접근성 문제에서, 영화, 게임, 예술 등을 즐기는 데 있어 다수와 다른 신체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즐기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윌체어 앱은 이러한 현실에서 시혜를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의지 실천의 결과이다. 앱 지도에 그려진 세상은 장애인이 실제 느끼는 세상이다. 그 지도에는 접근할 수 있는 장소보다 누군가 있다고 말해도, 갈 수 없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더 많다. 지도에 그려진 세상은 온통 구멍이 숭숭 뚫린 성기고 위험한 곳이다. 그 구멍은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지운 흔적이며, 민주주의의 빈틈이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마음껏 접근해서 존재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존재의 증명이 곧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소수만을 위한 특별대우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를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원칙상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배제된 자들을 통해 시험받는다. 누군가 그 문턱 때문에 사라진 존재로 취급될 때, 민주주의의 이상은 허물어진다. “접근할 수 없다면, 없는 것”이라는 말은 현실의 냉혹한 진단인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는 경고이기도 하다.
(2025.1001.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접근성 #베리어프리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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